이마저도, 엄마다
나는 아들에게 불안이라는 트라우마를 물려주는 엄마, 못난 엄마라고만 생각했다. 아이가 불안해해도, 불안한 마음을 안정적으로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능력 없는 엄마. 그저 트라우마를 대물림 하는 존재일 뿐인. 한동안은 어떡하지, 라는 생각만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불안이다). 내가 해소하지 못하여 불안이 아이에게 가는구나. 아, 정말 나는 못난 엄마다. 아이에게 그런 유산을 물려주다니. 그러다가 어제,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러고 나서, 인스타그램에 끄적이다 불안을 제대로 마주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불안은 없애야만 하는 것, 눌러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문득, 다른 생각이 듭니다. 불안에게 감사해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불안 덕분에 나에게까지 생명이..
세상과 알과 나
나는 살아보지 않은 삶에 저항했고,살아본 삶에 저항했다.내가 바라는 삶은,내가 살아본 삶에서 딱 한 걸음.적당히 위협적이고 적당히 안전한 도전.그게 나의 지금까지의 패턴이었다.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르게,이제는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힘을 빼려 노력하고 있다.하지만, 이 삶에도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든다.왜냐하면 살아보지 않았던 삶에 대해무의식적 위협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으며,그것에 대한 저항에 쓰는 에너지, 괜찮을거야,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너무나 버겁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어제,지금 나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나열해 보았다.그리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스케줄이 꽤 여유로웠기 때문이다.아, 버거운 것은 오로지 내 마음 뿐이었구나,하고 새삼 알아차린다.또한, 그..
불안을 뒤로, 사랑을 앞으로
나는 애를 쓴다. 나는 조심스럽다. 나는 연결되고 싶다.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거리를 둔다. 누구에게든. 내가 맞을까, 틀릴까에 대한 준거기준이 늘 밖이었고, 밖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밖에서 응답이 없으면 나는 불안해했다. 하지만, 불안은 내 안에서 올라오는 거였고, 타인의 인정의 응답을 받아도 의심하였으니, 결국 답은 자기신뢰였다. 무엇이 자기신뢰일까. 나의 근원을 믿는 것. 나 자신을 믿는 것. 다 알겠는데, 나를 어떻게 온전히 믿냐고.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적고 나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 정말로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을까? 아니다, 그냥 경험한 적이 없다고 거겠지. 어린 시절, 나의 겉과 내면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던 시절, 분명, 내게 그랬던 적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