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실천',이란 말은 초딩시절 <바른생활> 이라는 책에나 나올 것 같은 용어였다. 너무나 훌륭하지만, 너무나 진부한 말이어서 오히려 반감마저 드는 단어. 위인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신념의 말. 그래서 나에게는 너무 먼 단어.
그런데, 이 단어가 요즘의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처음에는 가족 심리 수업 중 선생님의 말 속에서였다. "당신이 그동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역동이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는 맥락의 말씀을 하셨었고, 그게 마음을 무겁게 훑고 지나갔다. 맞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친구 A의 말 속에도 있었다. 그녀는 아픈 중에도 불구하고, 계속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나의 트라우마에 갇혀서 가족 심리 수업을 그만두기를 포기하려던 그 때에도, 그녀는 나를 지지해주었고, 주어진 오늘을 살아나가려는 의지를 전해주었고, 그것이 나를 실천하는 삶으로 기울게 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저 마음 공부만 계속 해 나가면, 그렇게 마음을 푹 고아내면, 언젠가는 진국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최대한 연민으로 돌보고, 그 속에 삶을 살면 바라던 삶에 닿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배우고 익히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우고 익혀봤자,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게 증명된 것이었다.
그간에 가족 심리 수업을 통해, 그 옛날 나를 돌보지 '못했던'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부모님의 관계를 투사해 미워했던 남편과 더욱 자주 스킨십을 하고, 각자의 트라우마에 갇혀서 살고 계시는 시부모님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면 된다는 것 등등을 온 몸으로 배웠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자주 연락하지 않고, 남편을 보면 여전히 스킨십은 커녕 미움이 앞서서 전쟁같은 말을 날리고, 시부모님을 뵈면 사랑보다는 부담이 앞서는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정말 제대로 실천했다면, 엄마는 더욱 편안해졌을 것이고, 남편과의 관계는 따스해졌을 것이며, 그를 통해 아이의 상태도 더욱 안정되었을 것이다. 시부모님과의 관계 또한 더욱 편안해졌을 것이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이다.
실천하는 삶.
마음챙김과 연민으로 내 안만 보듬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엄마의 삶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엄마에게 미움도, 사랑도 있는 나를 인정하며, 자녀로써 그저 존경하며 사는 삶.
남편을 부모님의 관계에 투사하지 않고, 투사되어 미움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더라도, 그 투사를 알아차리고 나서, 존재 그대로 보고 보듬으며 사랑하는 삶. 안아주는 삶. 그 사람의 트라우마까지도 덮어줄 수 있는 배우자의 삶.
시부모님을 한명한명의 트라우마를 가진 인간으로 사랑하는 삶. 절대적 존재가 아닌, 험한 시절을 살아낸 보통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삶.
그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실천해야 함을 안다.
그래야 우리의 아이 또한 온전한 삶을 살게 되리라.
더욱 적극적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태양의 따스함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더욱 명상하리라. 더욱 보듬으리라.
더욱 사랑하리라. 더욱 실천하리라.
그 모든 내 개인적 트라우마와,
그들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코치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옳음도 그름도 아닌 (1) | 2024.09.21 |
---|---|
아이는 부재중 (6) | 2024.09.14 |
그 코코넛에 계속 손 넣고 있을거야? (3) | 2024.08.31 |
충돌 (0) | 2024.08.24 |
무국적자가 사는 법 (0) | 2024.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