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지방 출장으로 인해 출장지로 떠나고, 나는 아이를 재우고 일요일 밤에 머문다. 출장지에 도착한 남편이 전화를 건다. 잠깐 숙소 앞 마트를 가는 중이라고. 남편과는 몇 마디 길게 하지는 않는다. 푹 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니 무거움이 마음을 짓누른다. 왜 남편은 내리자마자 통화를 하지 않고 이제야 통화를 하는 걸까, 과연 자기 전에는 전화를 걸까, 왜 남편은 집에 와서 나랑 둘이서 대화하면서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을까. 서운해. 서운해. 서운해.
그러다가 깜짝,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금요일 밤에 올라온 남편은 토요일은 나의 교육을 위해서 종일 아이를 돌봐주었고, 친구 커플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일요일에는 종일 집안일(이불 빨래) 등등 과 아이를 돌보다가 갔다. 나의 투정이 정말 이치에 맞는가,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옛날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감정에만 치우쳐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투정을 부렸을 것이다. 왜 나랑 둘이서 대화를 하는 시간은 갖지 않았냐고, 모든 시간이 없었던 정황을 떠나서, 남편에게 화를 냈을 것이고, 남편도 어이없음에 화가 났을 것이다.
남편은 최선을 다 하고 갔다. 주중에 내가 오롯이 아이만 돌볼 수 있도록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의식주를 최대한 도와주고 갔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지만, 난 정서적 소통, 교류에만 치우쳐서 외롭다고, 남편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했던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실소가 나온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여전히 소리치고 있음을, 안다. 나를 더 사랑해주세요, 외로워요, 억울해요, 더 받았어야 했는데,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걸 줄 사람은 남편이 아니다. 남편이 아닌데, 남편에게 달라고, 나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외로움을 가지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남편도, 남편만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그렇게 자신만의 외로움을 갖고 사는 것이다.
왜 나는, 그것을 요구했을까. 그것이 보상해야 할 무엇인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부모에게서,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남편에게서. 지불 보증 수표처럼. 발행처가 희미해진, 유효기간이 지난 수표를 들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외친 것이다. 그것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 혹은 그것에 대해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서.
이건 남편이 해결해 줄 외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느낀다. 나의 본질적 외로움. 나의 환경과 성정적 외로움은, 누가 해결해 줄 것이 아니다. 아, 없구나, 없구나. 그리고 누구나 감내하며 살고 있구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오롯한 외로움을 마주 본다. 그 아득함과 진득함에 머문다. 안녕- 하고 인사해 본다. 첫 만남이다.